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yYYLgQ9-xd8)] [[소련]] 출생의 [[아이슬란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1937년 구 소련의 고리키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예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1955년에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듬해인 1956년에는 생애 최초로 공산권을 벗어나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해서 우승을 차지한다. 이 때 보여준 연주실력 덕분에 아쉬케나이지의 이름이 서방에서도 본격 알려지게 된다. 1962년에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차이코스프키 콩쿨은 공동 우승인데 이때 공동우승자는 영국 출신의 동갑내기 존 오그돈(John Ogdon).] 이듬해인 1963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시절에 만난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토룬 요한스도티어(Thorunn Johannsdottir)와 결혼하였다. 원래 소련 국적이었던 아쉬케나지는 이 결혼으로 인해 1974년에 아이슬란드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결혼후 아들을 낳은 아슈케나지는 공산국가였던 조국 소련을 떠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으며 영국으로 이주한 후 4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서방 세계에서 아쉬케나지는 연주회와 레코딩 양쪽에서 모두 주목받는 젊은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30살에 접어들면서 피아노 독주 연주자를 넘어 실내악 연주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한편 아쉬케나지는 1970년대부터는 지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75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본격 지휘자 경력을 시작한다. 이어 로열 필하모닉의 지휘자이자 음악감독,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와 독일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 베를린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앙드레 프레빈의 뒤를 이어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및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이 때 러시아/소련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었다.[*예시 [[https://youtu.be/0uA8k-99X6g?t=272|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1번, A-B-A' 중 A' 부분]] 대부분의 타 피아니스트들이 여기서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카덴차처럼 흘려버리는 파트를 아슈케나지는 메인 테마를 잘 살려서 연주했다.[[https://youtu.be/u6OlftugZl0?t=258|루간스키와 비교해보자.]] ] 하지만 로열 필이 재정난으로 휘청이자 1994년에 로열 필 지휘자(& 음악감독)를 사임하였으며, 1998년에는 체코 필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해서 2003년까지 활동하였다. 이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동경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맡았으며 2009년부터는 호주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겸 예술 고문직을 맡았다. 일반적인 피아니스트 출신 지휘자들이 대부분 지휘 활동에 전념하는 것에 반해 최근까지도 아쉬케나지는 앨범을 내는 등 피아니스트로의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20년 1월 나이와 건강 때문에 음악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